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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일 중독 벗어나기




강수돌, <일 중독 벗어나기 - 현대 사회의 일중독과 해결 방안 연구>, 메이데이 (2007)


왜 우리는 바로 지금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날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유보하는 것일까? 우리의 행복은 과연 언제까지 '집행 유예'되어야 하는가? (6)


2006년 12월에 별세하신, 'et 할아버지'이자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이던 채규철 선생님이 평소에 강조하던 말씀 중에, 삶에 있어 누구에게나 공평한 점이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과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라는 말씀이 기억난다. (6)


환상적인 미래를 그리며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일하라고 할 때, 과연 그 환상적인 미래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더 높은 소득을 올려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삶, 이른바 '부자 되기'로 요약된다. (8)


이 책에서 말하는 '일중독'이란 우리 삶의 내면이 공허할 때 그 허기를 일(성과)로 채우려는 질병의 일종이다. 마침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가 일을 해서 성과를 내면 칭찬도 하고 상도 준다. 그래서 사회가 이미 일중독을 잘 키울 수 있는 토양이다. (9)


과로사(Karoshi, work to death)란 말은 1980년대 일본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과중한 노동으로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를 악화시키고 뇌혈관 질환과 심근경색, 심장마비 등을 유발, 영구적 노동 불능이나 사망에 이른 상태"로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과로 >  만성피로 > 과로사의 순으로 전개된다. (22)


이제 일중독 현상은 그 정도나 형태의 차이는 다소 있을지언정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의 대부분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대중 현상mass phenomenon'이 되고 있다(하이데, 2002). (22)


한국의 경우 2000년대 들어 주5일제 논의가 확산되고, 2004년 이래 근로기준법에 의거하여 주5일제(40시간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함에도, 실 노동시간은 별로 줄어들지 않고 있다. 2004년에는 실 노동시간이 2,380시간으로, OECD국가 중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OECD, Employment Outlook, 2005). 한국의 노동자들은 주요 22개국의 평균 1,701시간보다 약 40%나 더 많이 일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연간 실근로시간은 1983년 2,734시간을 기록한 이래 2002년 2,410시간, 2003년 2,390시간 등으로 계속 짧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24)


찰스 핸디Charles Handy의 <헝그리 정신, The Hungry Spirit>을 보면 미국(연간 공식 노동시간 1,966시간)에도 일중독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미국 노동자의 42%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기진맥진함을 느끼며, 69%는 좀 더 평안한 삶을 살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30년 전에 비해 40%나 줄어들어 가족 사이의 인간적 유대가 훼손되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 1인당 소비증가는 45%에 이르지만 사회건강 지수에 나타난 삶의 질은 오히려 51%나 떨어졌다. ... 한편 버클리대 사회학과의 A.혹차일드 교수가 130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해 <뉴욕타임즈 매거진>에 발표한 글을 보면 아버지 중 33% 이상, 어머니 중 20% 이상이 자신을 '일중독'이라 하면서도 근무 시간이 줄어들기를 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직장을 "가정사의 온갖 스트레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5-26)


일단 쉬거나 미끄러지면 영원히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 (26)


보통 말하는 워커홀릭과 여기서 말하는 일중독work addiction은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이다. 워커홀릭은 일을 너무나 즐기는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일에만 몰입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개념이지만, 일중독은 그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그 차원을 넘는다. 즉 일중독은 몰입 개념을 넘어 일과 자신의 병적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병적 관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의학적으로 저의하는 워커홀릭이란 어떤 이유에서건 일 외에는 자신을 지탱할 정신적 힘이 없는 상태다. 사회 변화나 경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이나 가정의 개인적 삶이나 욕구는 제쳐둔 채 일을 우선시하는 태도로, 의학적으로 '과잉적응증후군'이라 불리기도 한다. 워크와 알코홀릭의 합성어인 '워커홀릭'이란 단어는 저널리즘적 용어이다. ... 그리고 워커홀릭이, 많은 경우 일중독자들이 스스로 '나는 워커홀리커(일중독자)'라 하면서 약간의 자랑스러워하는 감정(자부심, 능력 과시) 표현에 쓰는 개념이라면, 일중독은 사람들이 장난스런 분위기로나마 거의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진지하게 논의하지도 못하는 개념이다. (28-29)


이러한 특성들에 유념할 때 일중독이란, '일이 사람들의 삶에서 지배적 비중을 차지하면서 자기 일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도 병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또 갈수록 더 많은 일이나 더 높은 성과를 내야 만족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일을 중단하는 경우엔 견디기 어려운 불안감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병적 상황'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일중독자는 노동종속성이 강해 자신의 가치를 일이나 성과를 통해 찾으려 하기에 삶의 다른 측면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일중독자는 갈수록 더 높은 성과를 내야 희열을 느끼기에 성취감이나 도전감에 빠져서 점점 더 목표를 높이 설정해 나가고, 만일 할 일이 없어지거나 자유시간이 오면 기분이 어색하거나 적응이 잘 안 되며, 불안과 고독, 자기상실감, 심지어 죄의식 등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인다. (34)


하이데(2000)의 논의와 같이 "모든 중독증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면, 프리랜서형 중독자에게는 불충분한 성취에의 두려움이, 블루칼라형 중독자에게는 몰락에의 두려움이, 햄릿형 중독자에게는 무능의 탄로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경우 공통점은 일중독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나 삶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솔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내면에서 느끼는 각종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적극 관통해 정면으로 넘어서고자 하기보다는 그것을 은폐, 추방, 억압, 축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회피한다. 그 회피의 한 방편이 일중독으로 나타난다. 즉 일중독이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일중독의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중독 메커니즘에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일중독의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 칭찬과 포상의 방법으로 더욱 조장되는 상황이기에, 그 마취 효과는 다른 어떤 중독증의 경우보다 위력적이며, 그만큼 근본적 치유도 어렵다. (43)


정치경제학적 접근에서 일중독은 자본의 산물이자 자본의 토대다. 나아가 자본 자체가 중독 체제이다(하이데, 2000:63). 일중독이 자본의 산물인 것은 자본 관계가 성립한 초기에 무자비한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심대한 정신적 상흔을 얻었고 그 '상흔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한 결과, 참기 어려운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한 전략 또는 집단적 생존전략으로 '강자와의 동일시'와 함께 일중독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확장하면, 자본주의는 일중독뿐만 아니라 소비중독을 먹고 산다. 한편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다른 편으로는 열심히 구매하고 소비하는 인간형이 자본주의에 가장 적합한 인간상이다. (53)


심리분석학적 접근과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통합하여 고찰할 때, 우리는 일중독의 심층적 원인이 '두려움'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두려움은 인간이 자본주의의 폭력과 더불어 체계적으로 '내적 자율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생긴다고 볼 수 있다(하이데, 2000, 이주원, 2000, 이진우, 2000). 한마디로 일중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55)


일중독의 역사적 과정이란 자본주의의 형성, 발전 과정에서 인간이 진정한 자아(내면)와 분리되는 탈영성화despiritualization가 일어나는 것이 핵심이다. (60)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양반들의 걸음걸이는 느긋했다. 양반들은 노동 같은 것은 상놈 또는 천민이나 하는 것이라 여겼다. ... 이제 세상의 풍경은 조선 시대와 무척 달라졌다. 아무런 벌이 노동도 않고 집에 있기보다는 노동시장에 적극 참여하여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그래서 무언가 소득을 올리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 성공과 출새의 상징으로 되었다. 학교 졸업 뒤에 취업을 못하고 '백수'로 살아가는 것은 여가와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으로 비치기보다는 뭔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 누군가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자신이 하는 일이나 지위가 적힌 명함을 건네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명함도 못 내미는' 사람은 뭔가 쑥스럽고 수치스럽다. 그리하여 이제 일(직장)은 현대인에게 일상적 삶의 문화로 확실히 각인되고 말았다. ... 요컨대, 예전에는 일을 하지 않고 여가를 즐기는 것이 성공의 잣대였다면, 이제는 백수로 놀고 먹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것, 성과를 내는 것이 성공의 잣대가 되었다. (64-65)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양 제국주의 및 일본 제국주의와의 폭력적 관계 속에서 전통적인 삶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강자와의 동일시'라는 집단의식이 급부상했다. (66)


요컨대 이 모든 생각들의 바탕에는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배경에는 엄청난 강자의 폭력에 대한 상흔과 그로 인한 내적 자율성의 파괴가 깃들어 있다. 결국 우리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이제부터 약자의 모습에서 스스로 벗어나 강자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논리가 부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강자와의 동일시'가 조선사회에서도 개항기(1876-1884) 무렵 제국주의의 폭력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면서 일종의 집단적 생존전략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 문명의 수용을 통한 자강론과 부국강병론, 동도서기론 등이 조선의 개화 엘리트들에 의해 일종의 국가발전 전략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이러한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성은 근면하고 절약하는 방향으로, 즉 나라의 부름에 따라 부지런히 심히 일하는 방향으로 '개조'되어야 했다. (70)


오죽하면 외국 학자들이 서양에서 수백 년 동안에 가능했던 놀라운 경제성장을 단지 30년 만에 가능하게 만든 1960~1980년대의 한국 노동자들을 보고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라는 뜻의 '산업전사industrial soldier'라고했겠는가? 산업전사란 근면한 노동이 곧 애국이고 애국의 지름길이 곧 부지런한 노동이란 뜻이다. 그 반대인 게으름이나 노동운동 같은 것은 결국 국익에 해롭거나 매국적이어서 철저한 배격의 대상으로 각인된다. 우리가 이런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느릿느릿'을 강조하던 조선 시대 양반의 풍경이 오늘날의 '빨리빨리'로 변해 한국 사람을 상징하는 국제어로 통용되는 배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72)


점수나 성과 향상을 위해 시간을 보내면 생산적이라 느끼고 그렇지 못하면 시간 낭비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거나 자연과 접하는 시간 등 존재와 관계의 시간은 그 자체로 별로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77-78)


주어진 틀 자체를 문제 삼으면 죽음이 뒤따를 수 있지만, 주어진 틀 속에서 충성스럽고 능력 있게 일한다면 상당한 물질적, 비물질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불문율을 체득하는 것, 이것이 군대의 본질이다. ... 노동능력과 노동자세를 잘 갖춘 노동력을 우너하는 자본이 이러한 군대 조직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체득한 사람들(군필자)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83)


그러나 이러한 생산성 향상 과정은 불과 20%만이 건설적 생산성일 뿐, 80% 이상은 '파괴적 생산성'이다. 설사 임금, 지위, 복지 수준은 향상되더라도 진정한 삶의 질과 참된 행복은 망가지게되어 있다. (85)


국가가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학교 교육을 통해 반공주의와 성과주의, 성공 이데올로기가 조직적으로 재생산되고 또 그러한 가치관을 내면화한 가정에서도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육성한다. 나아가 부모들은 '보릿고개'와 같은 가난이 주는 일종의 '상흔'을 경험했기에 그로 인한 '탈락(가난)에의 두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일중독에 빠질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모습을 통해 아이들을 중독자로 키울만한 환경을 조성한다. 아이와 부모가 무조건적 사랑으로 연결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보다는, 부모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하면서 '피해 의식'을 갖게 되고 아이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의무감 내지 '부채 의식'을 갖게 된다. (90)


최근의 한 조사에서는 직장인의 88%가 이른바 '자기계발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매일경제>, 2006/12/1). (103)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30대 사망률만 보았을 때는 헝가리, 폴란드 다음으로 한국이 높다(한겨레 97/2/26). (104)


한국의 40대 남성 사망률은 전세계를 통털어 1위이고 여성보다 3배나 높다(<매일경제>, 2001/3/22).


사회 전체 차원의 일중독은 아무래도 집단적 성장 중독증으로 나타난다. D. 러미스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충분히 문제제기한 것이지만, 거의 맹목적인 성장 집착은 집단적 일중독이라 할 만하다. 지극히 일면적이고 편향된 수치로 표현하는 GNP나 GDP의 증가를 뜻하는 경제 성장이란, 곧 자연과 인간에 대한 끝없는 착취를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성장할 수록 착취와 파괴의 정도는 올라간다. 그런데 불행히도 착취와 파괴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성장에 대한 욕구는 강해진다. 또 주어진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가정, 학교, 군대, 직장 등 모든 삶의 공간에서 효율성과 생산성에 대한 집착이 증가한다. 경제 위기 국면에서 실업이 증가하고 비정규직이 증가할수록 '일'에 대한 강박증은 더욱 고조된다. 이제 일은 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일을 숭상하고 일자리를 위해 기도한다. (123)


원래 '개발development'이란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자연 환경이나 자원을 이용해 산업과 경제 진흥을 도모하는 행위다(조명래 외, 2005:16). 그런데 개발 내지 발전이라는 것이 정책적 개념으로 정립된 것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뒤인 1948년에 남미 등 신생 독립국을 지원하기 위해 '저개발' 지역을 '개발'하도록 한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개발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저개발의 이미지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고정된다(조명래 외, 2005:85).  개발과 저개발, 또는 발전과 낙후라는 말은 이미 개발 또는 발전이 바람직하다는 가치관을 전제로 한 가치편향적인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가치관이 후진국, 중진국, 선진국이라는 국가 발전 단계를 지칭하는 말로 이어진다. 게다가 1차 산업보다 2차 산업, 2차보다 3차 산업이 발전한 나라를 선진국 경제모델이라 이름 짓는 것도 바로 이러한 가치관에 토대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개발 개념, 또는 그에 토대한 후진국, 선진국 개념, 선진국형 경제 모델 따위는 모두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127-128)


사태가 이러한데도 개발 또는 발전이라는 개념이 마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처럼 모두가 수용하는 현실 자체는 대단히 가치편향적이다. 마치 평화라는 개념을 말할 때, 세계 원주민들의 경우는 "그냥 내버려두어지는 것"을 평화라고 보는데도(이반 일리치) 마치 대부분의 우리들은 전쟁이 없는 상태 또는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모두 잘 살게 한답시고 개발을 서두르는 상태 등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128-129)


신개발주의란 기존의 개발주의 담론이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와 맞물리고 다른 편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맞물려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다(조명래 외, 2005:223). 구체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박정희 시절에 본격 현실화된 개발주의가 1990년대 이후의 조건 속에서 새롭게 포장된 형태로 드러난 것으로, 보전과 개발을 동시에 강조하면서도 사실상 개발을 추진하는 것, 즉 환경을 경제적인 가치 범주 속으로 적극 편입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속가능한 개발' 또는 '환경 경영', '녹색 상품'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개발주의는 어떤 면에서 보아도 '위로부터의' 프로젝트다. 그러면 과연 누가 이를 추동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치가, 건설자본, 관료 및 공무원, 언론, 개발주의 학자, 부동산업계, 금융기관 등의 연합 세력이다. 이것은 개발을 위해 동원된 세력이라는 의미로 '개발동맹'(조명래 2005:83)이라 할 수도 있고, <일본, 허울뿐인 풍요>를 쓴 개번 매코맥n McCormack의 말대로 '토건 마피아'라 할 수도 있으며, 일본인들이 만든 용어로 '건설족'(박태견, 2005:5)이라 할 수도 있다. 나는 이들을 '건설 마피아'라 부르고 싶다. 건설업과 연관된 일종의 조직범죄 집단이란 의미에서다. (129-130)


이것은 한국의 신개발주의가 'IMF 사태'라는 상흔에 토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IMF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폭력적 경험이 한국 사회 전반에 신개발주의를 더욱 강박적으로 각인시켰으며, 그것이 사회경제 정책에도 병적인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다. (131)


일중독의 극복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노동을 중심으로 개인적, 체제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동사회'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다시 말해 잃어버린 자신의 내면 세계를 얼마나 재발견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174)


폴 라파르그는 <여유로울 권리>(1881)에서 노동자의 일중독과 과소소비를 문제 삼았지만, 오늘날 노동자들은 일중독과 소비중독 등 '이중 중독'에 시달린다. (178)


물론 가치관의 변화를 통해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일중독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룬 사례는 국내외적으로 꽤 많다. 예컨대, 하루 4시간 생계노동, 4시간 취미활동, 4시간 친교 시간으로 일상을 재구성하여 몸소 실천한 헬렌, 스콧 니어링 부부, 남녀노소 불문하고 일정한 역할 분담을 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면서 일-놀이-여가의 통일을 추구하는 야마기시 공동체, 자본주의 문명을 거부하며 손노동과 검소함을 중시하며 살아간느 아미쉬 공동체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180)